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경주 월성 (문단 편집) == 역사 == >望楊山下瓠公宅, 以爲吉地, 設詭計, 以取而居之. 其地後爲月城. >양산(楊山) 아래의 호공(瓠公)의 집을 바라보고는 길지(吉地)라고 여겨 속임수를 써서 취하여 거기에 살았는데, 그 땅이 뒤에 월성(月城)이 되었다. >---- >삼국사기 권1 신라본기1 탈해이사금 [[https://db.history.go.kr/item/compareViewer.do?levelId=sg_001r_0050_0010|#]] 《[[삼국사기]]》에 따르면, 월성이 세워진 곳에는 원래 초기 신라의 재상 [[호공(신라)|호공]]의 집이 있었는데, [[탈해 이사금|탈해]]가 그 땅이 좋음을 알고 속임수를 써서 빼앗아 살다가 뒤에 월성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望城中可居之地, 見一峯如三日月勢可久之地. 乃下尋之即瓠公宅也. 乃設詭計潛埋砺炭於其側, 詰朝至門云 “此是吾祖代家屋.” 瓠公云 “否”, 爭訟不决. 乃告于官, 官曰 “以何験是汝家.” 童曰 “我夲冶匠乍岀隣郷而人取居之, 請堀地檢看.” 從之, 果得砺炭乃取而居. >성 안에 살만한 곳을 살펴보니 마치 초승달[三日月] 모양으로 된 봉우리가 하나 보이는데 지세가 오래 머물만한 땅이었다. 이내 내려와 그 곳을 찾으니 바로 호공(瓠公)의 집이었다. 이에 지략을 써서 몰래 숫돌과 숯을 그 집 곁에 묻어놓고 새벽 아침에 문 앞에 가서 “이 집은 조상 때부터 우리 집입니다.”라고 말했다. 호공이 “그렇지 않다.” 하여 서로 다투었으나 시비를 가리지 못하였다. 이에 관가에 고하자 관가에서 묻기를 “그 집이 너의 집임을 무엇으로 증명하겠느냐?” 하자 “우리는 본래 대장장이였는데 얼마 전 이웃 고을에 간 사이에 그 집을 다른 사람이 빼앗아 살고 있으니 청컨대 땅을 파서 조사하게 해 주십시오.” 하였다. [동자의 말대로] 따르니 과연 숫돌과 숯이 나왔으므로 이에 그 집을 취하여 살게 하였다. >----- > 삼국유사 권1 기이1 탈해왕 [[https://db.history.go.kr/item/compareViewer.do?levelId=sy_001r_0020_0220_0020|#]] 《[[삼국유사]]》에는 탈해의 속임수가 더 자세히 기록되어 숯과 부싯돌을 몰래 묻고 나서 자신이 대장장이의 후손이며 옛날에 우리 가문이 살았던 땅이라고 호공을 속여 빼앗아 살았다는 내용이 있다. >婆娑王二十二年, 於金城東南築城, 號月城, 或號在城, 周一千二十三歩. >파사왕(婆娑王) 22년[* 서기 101년]에 금성 동남쪽에 성을 쌓아 월성(月城) 혹은 재성(在城)이라고 불렀는데, 둘레가 1023보였다. >---- >삼국사기 권34 잡지3 지리1 신라 [[https://db.history.go.kr/item/compareViewer.do?levelId=sg_034r_0020_0120|#]] >二十二年, 春二月, 築城, 名月城. >22년 봄 2월에 성을 쌓고 월성(月城)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秋七月, 王移居月城. >가을 7월에 왕이 월성(月城)으로 거처를 옮겼다. >---- > 삼국사기 권1 신라본기1 파사이사금 [[https://db.history.go.kr/item/compareViewer.do?levelId=sg_001r_0060_0240|#]][[https://naver.me/GmfaF95o|#]] 문헌 기록들에 의하면 원래 [[신라]] 건국 이래 왕궁은 [[혁거세거서간]]이 쌓았다는 [[금성(동음이의어)|금성]][* 금성의 정확한 위치는 현재 명확히 알 수 없지만, 위 기록을 역으로 읽으면 월성 서북쪽에 있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삼국유사]]에는 경주 서남쪽 창림사 자리가 신라 초기의 궁(금성)이라고 적혀 있다. [[나정]]이나 [[오릉]]과도 가까운 곳이다. 이곳도 여러 번 조사했는데, 2018년까지 사찰의 흔적은 나왔지만 왕궁의 흔적으로 보이는 것은 출토되지 않았다. 금성의 위치를 두고 이와 같이 여러 설이 있는데 더 자세한 내용은 [[금성(동음이의어)|금성]] 문서 참조.]이었다고 전해진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서기 101년인 제5대 [[파사 이사금]] 22년에 월성을 쌓고, 금성에서 이곳으로 도성을 옮겼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 발굴 결과 3세기 후반 이상의 유물이 출토되지 않아 문헌 기록과는 달리 빨라도 3세기경에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 >七年, 夏五月, 大水, 月城頽毀. >7년[* 서기 290년] 여름 5월에 홍수가 나 월성(月城)이 무너졌다. >---- >삼국사기 권2 신라본기2 유례이사금 [[https://db.history.go.kr/item/compareViewer.do?levelId=sg_002r_0080_0080|#]] >儒禮七年, 庚戌, 大水月城頹毁. >八年, 辛亥, 補築. >유례 7년 경술(庚戌), 대수(大水)로 월성이 퇴훼(頹毁)되었다. >8년 신해(辛亥), 보축(補築)했다. >---- >동경잡기 권1 성곽 월성 [[http://yoksa.aks.ac.kr/jsp/aa/ImageView.jsp?aa10up=kh2_je_a_vsu_24232_000&aa10no=kh2_je_a_vsu_24232_001&aa20no=24232_001_0002&pageid=35b|#]] >秋七月, 葺月城. >가을 7월에 월성(月城)을 수리하였다. >---- > 삼국사기 권3 신라본기3 소지마립간 [[https://db.history.go.kr/item/compareViewer.do?levelId=sg_003r_0060_0280|#]] >十年, 春正月, 王移居月城. >10년[* 서기 488년] 봄 정월에 왕이 월성(月城)으로 거처를 옮겼다. >----- >삼국사기 권3 신라본기3 소지마립간 [[https://db.history.go.kr/item/compareViewer.do?levelId=sg_003r_0060_0300|#]] >炤智九年, 丁卯, 葺之. >十年, 戊辰, 移居于此. >소지 9년 정묘(丁卯), 수리했다. >10년 무진(戊辰), 이곳으로 이거(移居)했다. >---- >동경잡기 권1 성곽 월성 [[http://yoksa.aks.ac.kr/jsp/aa/ImageView.jsp?aa10up=kh2_je_a_vsu_24232_000&aa10no=kh2_je_a_vsu_24232_001&aa20no=24232_001_0002&pageid=35b|#]] 《[[삼국사기]]》와 《[[동경잡기]]》에는 [[유례 이사금]] 7년(서기 290년) 큰 [[홍수]]로 월성이 무너져 이듬해 보수했으며, [[소지 마립간]] 9년(서기 487년)에 다시 이곳으로 옮겼다는 내용이 있다. 이외에도 중수만 29번을 거쳤다고. [[동해|동해안]]으로 상륙한 [[왜구]]가 월성을 포위할 정도로 위기에 빠진 적도 있었다. 전성기 [[고구려]] [[장수왕]]의 남진 정책의 위협이 거세던 [[자비 마립간]](475년)~[[소지 마립간]](488년) 사이 십몇 년에 [[명활성]]에 잠깐 왕의 거처를 옮겼던 것 정도를 제외하면 신라 멸망까지 8백여 년간 정궁으로 사용되었다. [[삼국통일]] 이전의 월성은 삼국사기에서 월성 주위가 보이며, 언덕 위에 반월형으로 흙과 돌을 혼용하여 쌓았고, 여기에 신라 역대 왕들의 궁성이 있다고 기록되었다. 월성은 여러 번 수리 및 증축했는데, 특히 [[문무왕]]은 삼국통일 이후 한반도에서 전쟁이 사라지자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서 대대적으로 궁궐을 증축했다. 현대의 조사 결과 월성-[[동궁과 월지]]-[[황룡사]]까지 이르는 넓은 영역이 [[통일신라]] 시기 왕궁 구역이었다고 드러났다. 현대에 들어 월성에서 지표 조사, 발굴 조사, 월성 내부 지하 레이더 탐사(GPR)를 실시했다. 조사 결과 성의 동, 서, 북쪽은 흙과 돌로 쌓았고 성벽 밑으로는 물이 흐르도록 인공적으로 마련한 방어 시설인 [[해자]]가 있었으며, 남쪽은 강을 따라 절벽인 자연 지형을 그대로 해자 용도로 이용했다. 동쪽으로는 문무왕 이후 새롭게 왕궁 구역으로 편입된 [[임해전]]으로 통했던 문터가 남아 있다. 지금은 안에 있던 많은 건물들이 사라지고 조선 [[영조]] 17년(1741) 월성 서쪽에서 이곳으로 옮겨 만든 [[석빙고]](보물 제66호)만 남았다. 지금으로서는 월성의 건물이 정확히 어떻게 배치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유구가 다 사라지진 않았고 아직 발굴이 안 된 부분이 훨씬 많다. 1955년 경주군 경주읍이 경주시로 승격되자, 경주군의 잔여 지역을 이 월성의 이름을 따 '월성군(月城郡)'으로 개칭했다.[* 같은 예로 [[수원시]]와 화성군(현 [[화성시]])이 있다.] '[[월성 원자력 발전소]]'라는 이름 등에서 아직까지 월성군 명칭의 흔적이 남아 있다. 이후 1989년 다시 경주군으로 명칭을 환원했고 1995년 도농통합제 실시로 경주군이 경주시에 통합되었다. 《[[일본서기]]》기록에 따르면 554년 [[관산성 전투]] 후에 신라군은 [[백제]] [[성왕(백제)|성왕]]의 목을 잘라 신라 왕궁의 북청 계단 밑에 묻었다고 한다. 신라의 왕궁이 월성 하나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어쩌면 월성 계단 밑에는 성왕의 머리가 있을지도 모른다. 다만 이 기록은 역사적 사실 그대로라기보다는 당시에 떠돌았던 한 가지 소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일단 일본서기의 해당 구절에서도 본문에선 성왕을 처형하고 구덩이에 묻었다고 쓴 뒤 그 뒤에 '이렇게 말하는 책도 있더라.' 정도로 언급했다. [[성왕(백제)|성왕]], [[진흥왕]] 문서 참조.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